What i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normies of these countries

What i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normies of these countries.

Attached: 1567280525047.jpg (400x320, 62K)

Other urls found in this thread:

youtu.be/5gD388N6OJQ
youtu.be/Ysx7Eyz4REU
en.m.wikipedia.org/wiki/Anti-Japan_Tribalism
twitter.com/SFWRedditImages

this

Attached: korean man and japanese woman.png (326x504, 278K)

Attached: 1566993946793.png (634x981, 312K)

Ever wondered how chickens and cattles treat each other?

They don't give a fuck. That's it. Unless one of them tries to be an ass.

It's mostly japanese women - korean men relationship

Attached: f1ea7c28f8e403974ab27f999a7da1f0e3fca98d.jpg (668x514, 74K)

Korea is endless beggar of compensation and japan got angry by it

Korean is delusional phycopath

Attached: D8B5DB67-B042-40FA-9D87-D5FD0A538400.jpg (673x1153, 418K)

Japan normies are weebs
Japan outcasts are zainichi subhumans
Korean normies are communist nationalist trash
Korean outcasts like me are based weebs who love japan.

Japanese normies can’t be weebs

you have to ask normies

I realized Japan - Korea thread is almost only Japan flag and Korea flag.

>one of them tries to be an ass
really make you think
youtu.be/5gD388N6OJQ
youtu.be/Ysx7Eyz4REU

Hmm i wonder too.

Based japanese with unique armor and stuff

Attached: 5vSQZP-1RTg.jpg (719x960, 162K)

And monogoloid looking koreans on the other hand

Attached: 34d775fc7cf1de1ded4fe144cd8cfc16.jpg (1024x768, 131K)

Should not be involved with each other

also -1 point for k-pop

I'm not a jap or a gook (despite what some jap flags might say), but I've seen normies interact on language exchange apps.

Basically a japanese girl will say she is learning korean but will just post pics of food and latte art. Then korean guys will give her lots of comments in broken japanese about how the food looks good. It's never a japanese man learning korean for some reason.

there's no normies in asia

There's a shit ton of normies in japan

>japanese man learning korean for some reason.
Ahh you know Japanese dont need to learn foreign languages including English

Name of the app?

hellotalk. Good luck kim

how many chicks(roasted) did you get?

It's easy to get them to chat with me but I don't live in Japan. I hooked up with 2 of them I met on the app when I visited though

Please don't hate each other, you're are on the same side against China.

Geeeeez

genuine curious
are roasted?

no korea went to chinese side

意味わらないよ

>same side against China
pic : South Korean conservatives who are against north korea

Attached: 1566137795783.jpg (650x1099, 146K)

Meanwhile in Monkey Valley

Attached: japs are K-slaves.jpg (850x1011, 52K)

Attached: 58d03666700f3ee3aa4b55b19be7bb9b.jpg (720x2310, 182K)

Korean is enemy of democracy and USA

Attached: F4D76345-F849-48DE-8D9F-2900C65DE96E.jpg (750x867, 779K)

lower lips told you their purity?

Attached: 1550047591885.jpg (550x979, 117K)

유라시아 동부 도서부(島嶼部)의 유력한 세력인 일본열도의 국가들은 네 번에 걸쳐 유라시아 동부 대륙 지역의 진출을 꾀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 첫 번째는 한반도의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에 걸친 시기였으며 이는 백제의 멸망과 함께 끝났다. 이후 한반도는 신라와 발해가 남북으로 병립하는 시기를 맞이했으니 이것이 한반도의 첫 번째 분단이었다.
두 번째는 고려시대 말기에서 조선시대 전기에 걸친 13~16세기의 왜구였다. 이들은 한때 고려와 명나라의 안정을 흔들 정도였으나 결국 항구적인 정착지의 확보에 실패하였다.
세 번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이다. 인도까지 정복하려 했다는 이 전쟁을 통해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단기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결국 축출되었다. 이때 일본 측은 명나라 측에 한반도의 분단을 제안하였으며 명나라에서도 조선 국왕의 교체를 논의하는 등, 한반도는 두 번째 분단의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네 번째는 조선의 강제병합부터 1945년 8월의 패전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일본열도의 세력은 만주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 세력으로 그 지위를 확고히 하는 듯하였으나 이 역시 실패하였다. 그리고 일본 세력의 급속한 퇴각에 따른 공백기에 한반도는 또다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열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Attached: 1566470412698.jpg (1280x720, 143K)

なるほど
They were pretty pure compared to American girls. Yes one of them had darker skin down there if that's what you're getting at

normies like kpop

I like both countries, just don't choose China.

소설 ‘삼국지연의’가 아닌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가운데 ‘위서(魏書)’의 한반도 관련 기사에는 왜인이 한반도에서 활동하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에서도 왜인이 신라의 도읍인 금성(金城)을 공격했다는 기사를 비롯하여 왜인의 지속적인 움직임이 관측된다. 이 시기를 다루는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을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기관으로 상징되는 일본열도의 중앙집권적 세력에 의한 것으로서 해설하며 이러한 이해는 일본에서 20세기 전기까지 이어졌다. 이에 따라 조선을 강제병합한 20세기 전반에 일본 측은 ‘일본서기’에서 ‘임나일본부’의 거점으로 그려지는 가야 지역에 대한 발굴 내지는 도굴을 시도하였으나 그 역사적 실체를 찾아내는 데 실패하였다. 최근 들어 가야 지역이 아닌 전라남도의 영산강 지역에서 일본열도 출신의 무사(武士)들이 묻힌 것으로 보이는 이른바 ‘왜계(倭系)’ 무덤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들은 중국의 ‘진서(晉書)’ 열전에 보이는 마한(馬韓)의 잔존 세력 ‘신미제국(新彌諸國)’이 백제에 저항하기 위해 고용한 용병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20세기 전기에 일본이 만들어낸 ‘임나일본부설’과는 무관하게 일본열도의 세력이 한반도 남부에서 군사적 움직임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일본부’란, 마치 일본열도의 통일 정권이 이들을 주도적으로 한반도 남부에 파견한 양 후세에 정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Attached: 1565856466363.png (1262x740, 1.25M)

>just don't choose China
say it to korean
sk leftists are sucking nk dick
sk conservatives are suckimg China dick

‘일본서기’ 등의 고대 일본 역사서에서 ‘임나일본부’의 창세기(創世記)로서 존재하는 것이 이른바 ‘진구코고(神功皇后)의 삼한 정벌’ 전설이다. 이 전설의 개요를 간단히 설명하면 진구코고의 남편인 주아이텐노(仲哀天皇)가 규슈 지역에 군사 원정을 갔다가 한반도를 정복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도 무시한 바람에 죽자, 진구코고가 이 신탁(神託)을 수행하여 신라·백제·고구려를 정복, 일본의 속국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진구코고라는 사람의 실존 여부, 과연 이 시기에 일본열도에 이처럼 대규모의 해외 원정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단일한 중앙집권 정권이 존재했는가의 문제를 포함하여 ‘진구코고의 삼한 정벌’ 전설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성의 여부와는 별도로 전근대 일본에서는 이 전설을 통해 한반도 남부 지역에 대한 자신들의 군사적 개입과 국제관계를 설명해 왔다

Attached: 1565242278027.jpg (406x607, 69K)

이 씨발 병신 새끼야 니가 하는 짓거리가 한국을 버털트로 보이게 만드는거다 제발 쪽바리랑 붙고 싶으면 저새끼들처럼 사진 한두장으로 끝내던가 아니면 영어 번역 달고 자료 만들어서 까던가 둘 중 하나만 해라 니처럼 아무도 못알아처먹는 한글로 도배해봐야 우리만 욕먹는다 시발 트롤짓 할 시간에 영어 공부나 해라

이처럼 일본열도의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의 대륙 지역에서 자신들의 활동이 시작되었음을 설명하는 것이 ‘진구코고의 삼한정벌’이었다면, 그 활동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한 일본의 수군이 당나라 군대와의 전쟁에서 패한 663년 8월의 백강전투였다. 신라·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의자왕 등의 지배층을 당나라로 끌고 가자, 백제 부흥군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귀국시키고 일본 세력의 힘을 빌리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백제 부흥군이 육지에서 신라군에 맞서고 일본 수군이 오늘날의 금강 근처에서 당의 수군과 맞서 바다를 피로 물들일 정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신라·당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백제의 멸망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로써 일본열도 세력이 한반도 남부에서 군사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지는 사라졌고, 그들이 유라시아 동부 대륙에 거점을 확보하고자 하는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 시도는 유라시아 동부의 정세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였으며, 한반도의 분열상태라는 불안정 요인이 제거되어 이후 신라·당·일본은 국내외적으로 안정을 유지하게 된다.

Attached: 558e84dd22b679afc9f9.jpg (646x513, 285K)

also how old do you think were they?

‘고려사’에서는 왜구가 처음으로 활동한 것을 1223년으로 전하면서도, 1350년 기사에서 ‘왜적의 침구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라는 설명과 함께 왜구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고 적고 있다. 참고로 고대 영국의 역사서인 ‘앵글로 색슨 연대기(Anglo-Saxon Chronicle)’에도 유럽의 왜구라 할 바이킹의 첫 활동은 787년 기사에 기록되어 있지만, 793년 기사에서 “번개가 몰아치고 사나운 드래곤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등 무시무시한 전조들이 노섬브리아 땅에 일어나 사람들을 매우 두렵게 하였다. 그 직후에 큰 기근이 있었고 같은 해 1월 8일에 이교도들의 무리가 린디스판에 자리한 하느님의 교회를 약탈하고 살육하였다”고 하여 바이킹의 활동이 이때 본격화되었음을 인상 깊게 전한다. 이처럼 왜구와 바이킹은 유라시아 동부와 서부의 대륙의 국가들에 충격을 주며 여러 세기에 걸쳐 활동하였지만, 노르망디·시칠리·러시아 등의 항구적 정착지를 마련한 바이킹과 달리 왜구는 대륙에 거점을 만드는 데 실패하였다.

Attached: 1543296642028.png (397x395, 331K)

Over 30, but so am I

왜구 세력이 소멸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한반도는 이종무가 이끄는 조선군이 1419년에 쓰시마를 공격한 것과 같이 일본열도에 대해 공세적 입장을 취하였다.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무역을 활성화함으로써 왜구가 취할 수 있는 상업적 이익을 줄이고, 왜구에 섞여 있던 왕직(王直)과 같은 중국인을 회유하여 제거하였으며, 척계광(戚繼光)과 같은 장군들이 왜구에 맞설 수 있는 효과적인 전술 전략을 개발하였다.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통일 정권이 수립되면서 왜구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특히 도요토미 정권은 한편으로는 왜구를 진압한 공을 인정해 달라고 명나라에 요구하여 전쟁의 명분을 만들고, 또 한편으로는 왜구 세력을 흡수하여 임진왜란 당시 수군의 일부에 편성시키는 이중적 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왜구의 활동과 임진왜란이라는 침략 전쟁을 동일한 성격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지만, 왜구의 활동에서는 일본열도의 통일된 정권이 대륙을 정복하려는 의지와 그 의지가 실현되는 메커니즘이 파악되지 않기 때문에 필자는 이에 부정적이다.

Attached: 1542628170516.jpg (1083x578, 535K)

no one understand ur WoT
read Anti-Japan Tribalism
en.m.wikipedia.org/wiki/Anti-Japan_Tribalism

the best seller book explains how sk governments deceived sk people

저새끼 한국인 아닐듯
한국인이 지 얼굴에 먹칠하는 저딴 자살골 넣을리가 없음
저건 그냥 못이기겠으니 악만 남아서 미친짓 하는거임 한국인이 그런 미친짓을 할리가 없지
저새끼 프록시 돌리는 개쪽바리새끼거나 화교새끼일듯

임진왜란은 일본열도의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의 대륙부를 침공한 세 번째 사건이었다. 열도의 100년간 분열을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열도 내에 가톨릭을 포교하려 하자 일본을 불교와 신토(神道)의 국가로 규정하여 이를 저지하였다. 그러나 아직 그의 지배가 일본열도의 구석구석에 미치지 못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조총이나 전함과 같은 가톨릭 국가들의 우수한 군사 물자를 지원받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가 시행한 것과 같은 철저한 기독교 탄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고스티뇨 고니시 유키나가(Agostinho·小西行長)와 같은 유력 가톨릭 장군들이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a de Cespedes)와 같은 예수회 신부를 일종의 군종신부로서 한반도로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임진왜란은 가톨릭을 믿지 않는 유라시아 동부 지역에 대한 일종의 ‘성전(聖戰)’이었다. 당시 유럽 가톨릭 국가들도 종교의 이름으로 남아메리카를 비롯한 세계 각지를 정복하고 원주민을 학살하는 데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니, 임진왜란 당시의 가톨릭 장군과 병사들 역시 기본적으로는 그러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Attached: 1551046444909.jpg (3378x994, 722K)

thanks, I always wondered what kind of female were using that kind of apps.

한편 임진왜란 중 고니시 유키나가와 대립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 正)는 열렬한 불교신도였다. 그가 신앙한 불교는 13세기에 니치렌(日蓮)이라는 승려가 개창한 니치렌슈(日蓮宗)라는 종파이다. 니치렌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 의 힘으로 몽골·고려 연합군의 일본 침공에 맞설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니치렌슈는 일종의 일본적 ‘호국불교’로서 기능하였다. 니치렌슈 신도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일본이라는 국가보다 위에 있다는 근본주의적 주장을 펼치며 반란을 일으키거나 그때마다의 정권에 저항하였기 때문에 탄압을 받았다. 이 종교의 일파인 창가학회의 설립자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는 일본 정부가 국가신도(家神道)를 강제하는 데 저항하다가 감옥에서 사망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신앙이나 사상에 투철하여 국가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사례는 일본열도의 역사상 보기 드물다. 참고로 같은 시기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는 수십 명의 여호와의증인 신도가 마찬가지 이유로 체포되어 옥응련 등이 옥사한 ‘등대사(燈臺社) 사건’이 있었고, 한반도에서는 박관준 등 수십 명의 기독교 신도가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옥사하였다.

Attached: 1537523906308.jpg (480x480, 46K)

저새끼 조선족인거 같다
He seems joseonjok

Exchange with South Korea has no profit for Japan.

Korean is endless beggar of compensation and this is reason Japanese dislik then

Who would like beggar? Simpl logic

pls stop making japan korea thread for your fun.

(;_;)

가토 기요마사의 경우는 정치에 대한 종교의 우위를 주장하여 국가에 대립하는 것과 같은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 대신 일본의 토착 신앙인 신토와 니치렌슈라는 열광적 불교 종파의 가르침을 체화하여 자신의 군사적 행동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였다. 조선 침공을 선언한 도요토미는 가토가 독실한 니치렌슈 신도임을 알고는 이 종파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이라는 글귀가 적힌 깃발을 하사하였다. 가토는 이 깃발을 내걸고 임진왜란 7년간 한반도에서 활동하였으니, 그에게도 임진왜란은 니치렌슈를 믿지 않는 이교도와의 ‘성전’으로 간주되었을 터이다. 가토가 사명대사와 같은 조선의 불교 신도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로 임한 것 역시, 그가 임진왜란을 일종의 종교전쟁으로 보았음을 짐작케 한다. 불교는 역사상 평화로운 종교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대규모의 승병(僧兵)을 지닌 사찰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중세 일본이나 미얀마·스리랑카의 현대사에서 보듯이 불교도가 공세적 입장에 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Attached: T1o3A8-Y_400x400.jpg (400x400, 51K)

이렇듯 1592년의 개전 당시 일본군의 선봉에 선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각기 기독교(가톨릭)와 불교(니치렌슈) 신도였으며, 이들에게 임진왜란은 일종의 종교전쟁이었다.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 측의 기록에서는 일본군이 부처와 일본의 여러 신의 도움으로 전투를 잘 치를 수 있다는 대목이 적지 않게 확인된다.
여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중에 전쟁의 목표를 변경하면서 임진왜란에서의 학살은 도를 더해갔다. 인도와 중국을 정복하여 중세까지 일본에 알려진 세계 전체인 인도·중국·일본을 모두 지배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던 전쟁 초기에는 한반도가 향후 장기전의 거점으로 간주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은 한반도의 주민들에 대한 지배를 철저히 함으로써 군량미의 원활한 보급 등을 꾀하였다. 그러나 조선 민관(民官)의 항전과 명나라 군의 참전으로 인해 ‘세계 정복’의 기대가 1년 만에 꺾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반도의 남부 4개 지역만이라도 점령하고자 명나라 측에 한반도 분할론을 제안한다. 명나라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러한 조건으로 강화 교섭을 추진하는 한편, 명 조정의 일각에서도 조선 국왕의 교체를 주장하는 등 조선은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결국 국왕 교체와 한반도 분할안 모두 기각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실력으로 한반도 남부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1597년에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자신들의 당초 의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한 보복으로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일본군이 조선인을 학살한 것은 주로 이 시기였다.

Attached: 5054f8d09d488b002045e5d634bc3618.jpg (1280x720, 136K)

stop nida nida sumida popypaste.

you fuckin gook.

Sorry but it's actually mostly late teens and twenties. Not all of them are looking for a foreigner anyway

Instead of hating, why don't you try it to practice your english? Maybe you can find a nerdy white girl that has pure lower lips

니들 저새끼 모름? 맨날 유치한 합성 만들어와서 발작 일으키는 트롤임
쟤말고 진짜 팩트로 자료만들 대가리 깨는 한국인 유저 있는데 걔가 진땡이고 저새낀 그냥 병신임 한국인은 아니라 생각되긴함

유라시아 동부를 지배하고자 하는 목표를 내걸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여름에 사망하자 전쟁을 계속 할 명분을 상실한 일본군은 열도로 되돌아갔다. 이로써 일본열도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 대륙부에 대한 지배를 꾀한 세 번째 시도도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세 번째 시도가 유라시아 동부에 미친 영향은 이전의 두 차례와는 달랐다. 중국에서는 한족의 명나라가 만주족의 청나라로 교체되었고,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정권이 몰락하고 도쿠가와 정권이 들어서는 등 정권 교체가 있었다. 이 영향은 타이완과 동남아시아에까지 미쳐서 이들 지역의 정치적 지형을 바꾸었다. 한반도는 분단의 위험을 피했지만 잇따른 쿠데타와 반란, 그리고 만주족과의 두 차례 전쟁과 점령이라는 일련의 사태를 겪으며 왕조 교체에 준하는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그런 의미에서 임진왜란은 유라시아 동부의 질서를 재편한 100년간의 장기적 변동기를 연 사건이었다. 앞으로 몇 주에 걸쳐 이 100년간의 격동기를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Attached: DWucPuEU0AAN-hq.jpg (474x424, 25K)

so 2 kims fighting each other or 1 kim seething?

ㄹㅇ 한국인이 왜 저 병신짓을 해서 셀프욕처먹기 하냐 ㅋㅋ 조선족이든 화교든 둘 중 하나겠지

Irrelevant is desirable

>Instead of hating, why don't you try it to practice your english? Maybe you can find a nerdy white girl that has pure lower lips
common Im not hating anyone. I just try to tell kims whats going on there.
also i dont want white girl if they were pure virgin.

1932년에 설립되어 초기에는 '관동군 방역급수부', '동향부대'로 불리다가 향후에는 '731부대'로 개명하였다. 중일 전쟁(1937~1945년)을 거쳐 1945년까지 생물·화학 무기의 개발 및 치명적인 생체 실험을 행하였다. 공식적으로는 ‘헌병대 정치부 및 전염병 예방 연구소’, '방역과 급수에 대한 임무'로 알려졌으며 실제로 '이시이 시로'는 731부대의 진짜 목적을 위장하기 위해 휴대용 야전 정수기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원래는 태평양전쟁 전 정치 및 이념 부서로 설립되어 적에 대한 사상, 정치적 선전과 일본군의 사상 무장이 임무였다. 첫 부임자였던 의사 이시이 시로(石井四郞)의 이름을 따라, 이시이 부대(石井部隊)라고도 불린다. 731부대는 또한 히로히토의 칙령으로 설립한 유일한 부대이며, 히로히토의 막내 동생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가 부대의 장교(고등관)로 복무하였다.

설명
이 부대는 중국 헤이룽장 성(黑龍江省) 하얼빈 핑팡(平房, 당시 만주국 괴뢰 정부의 영토)에 주둔해 관동군 관할 구역 내의 정수 업무를 하는 것으로 위장되었다. 이 부대는 일본의 정치적 선전, 일본 군대의 사상적 대표로서 업무를 수행했다. 처음에는 공산주의 정치 선동에 대항해 일했으나 나중에 그 영역이 확대되었고, 화학·세균전 준비를 위한 연구와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생체 실험을 위한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관동군 주력부대에 물을 공급하는 급수전문 전투지원부대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생체실험을 자행한 부대였다.

Attached: 1527566409778.jpg (480x533, 46K)

>nida nida sumida
kek you make my day. www

731부대는 크게 보면, 독일 나치의 SS같은 정치 선동 부서이다. 여기서는 일본인의 인종적 우월성, 인종주의 이론, 방첩 활동, 정보 활동, 정치적 사보타주, 적 전선 침투 등에 관한 활동을 하였다. 이 부대는 만주 헌병대, 만주 정보기관, 만주 정규 경찰, 만주 거류민 위원회, 지역 만주 민족주의 정당, 일본 비밀 정보기관과 긴밀히 연락했다. 이 부대의 만주에 있는 부문에서는 백러시아인, 중국인, 만주인, 몽골인과 기타 특수 부서, 비밀 부서 경력의 외국인을 활용했다.

민간인과 군인 모두 1만 명의 중국인과 조선인, 몽골인, 러시아인이 이 부대의 실험 대상이었다. 일부 미국인과 유럽인 등 연합군 전쟁 포로가 731부대의 손에 죽었다. 게다가 이 부대에서 생물학 무기 프로그램에 의해 연구된 생물학 무기의 사용으로 수만 명의 중국인이 죽었다.

731부대는 일제가 세운 생물전 연구기관 중 하나였으며, 516부대(치치하얼 시, 齊齊哈爾), 543부대(하이라얼 시, 海拉尔), 773부대(Songo), 100부대(창춘, 長春), 1644 부대(난징, 南京), 1855부대(베이징, 北京), 8604부대(광저우, 廣州), 200부대(만주), 9420부대(싱가포르) 등 동아시아 각지에 세워진 기관도 731부대와 유사하거나 731부대의 생체실험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헌병대가 관리하였다.

Attached: 9c1c8487e7b8d14636416d21e4eeff19.jpg (720x1280, 377K)

인체를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는 부대의 속성상, 부대 주변 지역을 전부 소개하고 지역주민을 전부 추방시킨 사례나, 부대 인근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생물학무기를 실험한 사례등 인근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실험한 사례까지 알려져 있는 등 하얼빈역에서 출발한 열차가 부대 인근 지역을 통과 시 열차 커튼을 모두 내려야 하고 부대인근지역을 차창밖으로 내다보는 승객은 그 자리에서 체포/심문하는 규정이 존재하였을 정도로 보안에 매우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731부대와 관련된 많은 과학자가 나중에 정치, 학계, 사업, 의학 부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일부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하바로프스크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다. 또 다른 일부는 중국공산당에 체포되어 무순전범관리소에서 심리를 받고 심양전범재판과 태원전범재판에 회부되었다. 미국에 항복한 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자료를 제공하는 대가로 사면받았다. 그들이 행한 잔인한 행위 때문에 731부대의 활동은 유엔에 의해 전쟁범죄로 선포되었다.

형성
1932년 이시이 시로는 ‘육군 전염병 예방 연구소’라는 이름의 의무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와 그 부하들은 종마 수용소를 건설했다. 이곳은 그 지역에는 종마 요새로 알려져 있다. 이 실험 수용소는 ‘베이인허’에 있는데, 하얼빈 시에서 남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 이시이는 ‘토고 부대’를 조직했는데 화학, 생물학 작전을 하기 위한 비밀 연구 그룹이다. 1935년 탈옥과 폭발이 있었고, 이시이는 종마 요새를 닫을 수밖에 없었다

Attached: 1535520824337.jpg (500x367, 28K)

그는 나중에 핑팡(하얼빈 시에서 남쪽으로 24킬로미터)으로 가서 훨씬 더 큰 새로운 시설을 만들었다.

이 부대는 나중에 관동군으로 통합되어 ‘전염병 예방부’가 되었고, 같은 시기에 ‘이시이 부대’와 ‘와카마쓰 부대’로 나위어졌다. 창춘에 있었다. 1941년부터 이 부대들은 합쳐서 ‘관동군 방역 급수부’ 또는 731부대로 불린다. 이 부대는 제국청년군(Imperial Young Corps), 대학의 연구소, 헌병대의 지원을 받았다. 어떤 이는 731부대가 헤로인 생산을 위해 만주에서 양귀비를 경작하던 미쓰이 재벌과 연계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당시 일본의 헌병대는 2개로 분류돼 있었다. 내부담당 헌병과 외부담당 헌병이 있었는데 국내에 있는 헌병은 육군대신(국방부장관) 아래 있었다. 외부의 헌병은 침략국에 가면 군령 헌병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군사령관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힘이 있었다. 군인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민간인도 관할했다.… 1938년 8월 26일전에는 특별취급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 후에 있었는데, 특히 구 만주국을 침략했던 헌병들은 특별 이송취급도 관할했다. 관동부 헌병 사령부가 마루타를 취급하고 있는 헌병대로 통지서를 보내 소련에 대한 정보활동을 한 사람, 반만항일(反滿抗日)에 관련된 자, 군과 국가에 대한 반항죄에 해당하는 자는 체포하여 특별취급으로 규정해서 731부대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당시 일본 제86부대의 헌병이었던 일본인 미오 유타카(1998년 7월 사망)

Attached: 1565657539607.jpg (1280x720, 97K)

I guess this kim should be a victim of distorted anti-jap education, even though i dont understand the ayyy language.

암호명 ‘마루타’의 특별계획은 실험할 때 인간을 사용하였다. 실험 대상은 주위 인구 집단에서 징용되었고 이들은 완곡어법으로 ‘통나무’(마루타)라 불리었다. 마루타란 용어는 구성원 중 일부의 농담에서 유래했다. 이 시설을 지역 당국에는 제재소라고 했기에 그런 농담이 생겼다. 실험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였고, 심지어 임산부까지 동원되었다. 수많은 실험과 해부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마취없이 이뤄졌고, 이는 부패 등이 실험결과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생체 해부와 의학 실습
수천 명의 수용소의 사람들은 생체 해부의 대상이 되었으며, 많은 해부가 실험의 유효성을 위해 마취없이 이루어졌고 피해부자들은 대부분 사망하였다. 수용자들을 다양한 질병에 감염시킨 후 외과수술로 해부하였고, 질병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장기를 제거하였다. 감염이나 해부를 당한 대상은 성인 남녀뿐 아니라 아동이나 영아 또한 포함하였다.

출혈의 연구를 위해 수용자의 팔다리를 절단하였고, 절단된 팔이나 다리를 수용자의 반대편에 다시 봉합하는 실험 또한 진행되었다. 몇몇 수용자의 팔이나 다리는 얼려져 절단되었는데 일부는 다시 녹여져 치료받지 않은 괴저 및 부패의 영향을 연구에 사용되었다. 일부 수용자의 위는 외과적으로 절제되었고 식도와 장이 연결되기도 했다. 이외에 뇌, 폐, 간 등의 절제 수술 또한 행해졌다.

Attached: 2b181d62c397455bf01329272229a46b78e33df3e421528043a6e87a96988cd3.jpg (640x1136, 150K)

일본제국의 외과의사였던 유아사 켄(湯浅謙)는 생체실험은 731부대의 밖에서도 널리 행해졌으며 중국 대륙에서의 실험에 약 1000명의 일본군이 관여되어 있을 것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1945년 5~6월 규슈제국대학 의학부 제1외과 이시야마 후쿠지로와 제자들은 격추된 미군 B29 탑성원 포로 8명을 대상으로 수술 실험을 하였다. 수술 내용은 다음과 같다.

5월 17일 포로 2명의 한쪽 폐를 전부 적출
5월 22일 포로 2명 중 1명에게 위 전 적출 수술. 대동맥을 압박해 지혈하고 심장 정지시킨 후 개흉 심장 마사지, 심장 수술, 나머지 1명은 상복부 절개하고 담낭을 적출, 간장의 편엽을 절제5월 25일 포로 1명에게 뇌수술(3차 신경 차단)
6월 2일 포로 3명 가운데 1명에게 오른쪽 대뢰동맥에서 약 500cc를 채혈한 후 대용 혈액약 300cc 주사. 1명에게 폐동격 수술, 나머지 1명에게 담낭 적출, 대용 혈액 200cc 주사, 간장 절제, 개흉 심장 마사지, 심근 절개 및 봉합, 대동맥 압박 지혈

Attached: RVkaUPEd.jpg (288x288, 11K)

동상 실험을 했던 다니무라라는 인물은 실험 대상자들에게 야외 실습 실험을 하기도 하였다. 다니무라는 동계 위생 연구반을 조직해 텐트에서의 수술, 지혈, 수혈 등에 대해 가르치는 야외 실습을 했는데, 중국인 8명은 생체 실험 재료로 사용되었다. 이 8명은 실험이나 수술이 끝난 뒤 살해돼 생체 해부용으로 쓰이거나 총살됐다고 한다.

생화학 실험
수용자에게는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이 예방접종으로 위장된 채 접종되었다. 치료받지 않은 성병의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 남녀 수용자에게 일부러 매독, 임질을 감염시키고 연구하였다. 수용자들은 간수 등에게 강간당하기도 했다.

전염성 벼룩, 감염된 의류와 물자가 폭탄 안에 포장되어 다양한 목표물에 투하되었다. 이때 이시이 시로 중장이 직접 개발한 도자기 폭탄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도자기 폭탄은 폭발력을 고의로 약하게 만들어 안에 내장된 세균이 죽는 것을 최소화했다. 이에 따라 흑사병, 콜레라, 탄저 등 전염병으로 약 40만 명의 중국인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민간인에게 야토병 관련 실험이 행해지기도 했다. 731부대와 소속 군부대(주로 1644부대나 100부대)는 생화학무기를 개발하여 전투에서 실험하기도 하였다.

특히 페스트균 실험을 많이 했는다. 페스트균은 흑사병으로도 잘 알려져있는데, 14세기 지중해 연안, 프랑스, 독일, 영국, 북유럽으로 확산해 4년 만에 유럽 인구 1/3 이상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였다. 이를 살육전에 적용하려 한 731은 '페스트 벼룩'을 개발한다. 균 자체를 그대로 뿌리는 것이 아니라 매개 동물인 벼룩을 페스트균에 감염시켜

Attached: 1565070327984.jpg (741x649, 278K)

완충물에 섞거나 도자기 폭탄에 담아 뿌렸다고 한다. 실제 중국에 살포한 세균의 상당수는 이 페스트균이었다. 미국에서 파견을 나왔던 노버트 H. 펠은 1947년 6월 30일 본국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벼룩 번식법과 쥐를 통해 벼룩을 감염시키는 방법을 방대하게 연구했다.
페스트 벼룩은 최선의 조건 하에서는 약 30일 생존하는데, 그동안 감염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판명됐다.

1㎡당 벼룩 20마리가 있는 방에서 실험 대상자를 자유롭게 풀어두는 실험을 했는데, 10명 중 6명이 감염되고 4명이 사망했다.
—페스트 벼룩 실험에 대해

사람을 묶어 헬멧을 씌우고 갑옷을 입혔다. 지상에서 고정해 폭발하는 것, 비행기에서 투하된 시한 기폭 장치가 설치된 것 등 각종 폭탄으로 실험했다.
—탄저균 폭탄 실험에 대해

10명 중 6명의 혈액에서 균이 발견됐고 이 중 4명은 호흡기로부터 감염됐다고 추정했다. 4명 모두 사망했다. 이 4명과 일제히 폭발한 9개 폭탄과의 거리는 불과 26m였다.
—다른 폭탄을 사용한 야외 실험에 대해

연구소에서 키운 벼룩을 저공비행으로 중국 도시에 살포했는데, 1940년에는 닝보 시에서, 1941년에는 창더 시와 허난 성에서 살포가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발생한 페스트 전염으로 수천 명이 살해당했다.

Attached: 1540523093778.jpg (624x351, 46K)

Listen carefully

South Korea is
Enemy of democracy side.
South Korean is already the side of NK and china.
Japan and USA never forgive you betrayer of democracy also endless beggar of compensation.
So korea is already ended.just die in endless Japanese economical sanctions


South Korea break the General Security of Military Information Agreement.

This is just benefits for NK and China so much.

And this will destroy the influence of USA in east Asia.

South Korea is doing whatever good for NK and China right now

일부 수용자는 질식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알아보기 위하여 목을 매달았다.
일부 수용자는 색전이 생기는 시간을 결정하기 위하여 동맥(또는 심장)에 공기가 주입되었다.
일부 수용자는 신장에 말의 소변이 주입되었다.
일부 수용자는 사망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결정하기 위하여 물과 음식을 전혀 주지 않았다.
일부 수용자는 사망할 때까지 저기압의 방에 놓였다.
일부 수용자는 극저온에 놓이어 동상이 걸리게 하였다. 그런 조건에서 얼마나 생존하는지, 인체 살의 부패와 괴저가 어떤 효과를 일으키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이는 주로 여성 수용자에게 행해졌다.
일부 실험은 온도와 화상, 인간 생존의 관계를 알기 위한 것이었다.
일부 수용자는 원심분리기에 넣어져 사망할 때까지 돌려졌다. 인체 수분 함량 비율을 알기 위해서였다.
동물의 혈액이 일부 수용자에게 주입되어 그 효과가 연구되었다.
일부 수용자를 가스실에 넣어 다양한 종류의 화학 무기를 시험했다.
바닷물이 몇몇 수용자에게 주사되었다. 바닷물이 생리식염수를 대체할 수 있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무기시험
731부대는 인간 목표물을 다양한 거리에 위치시켜 수류탄의 살상력을 시험하였다. 인간들은 화염방사기의 실험에도 사용되었으며, 생화학무기나 기타 폭탄들도 시험되었다.

Attached: 1532352830625.jpg (1024x500, 83K)

731부대의 판임관(위관급 장교)과 고등관(영관급 장교 및 기사(의사))들은 실험이 이미 끝났지만 살아있는, 그러나 실험으로 인해 쇠약해지거나 병들어 죽음을 앞둔 수용자들을 원판에 묶은 뒤 원판을 돌리며 그 원판에 단검을 던지는 게임을 했다. 이때 판임관들 사이에서 도박이 행해졌는데 명중되는 부위를 걸고 자신이 선택한 수용자의 신체부위에 단검이 명중되었을 경우 그 간부가 도박에 걸어놓은 돈을 전부 획득했다.
731부대의 군인들은 때때로 아직 실험하지 않은 여성 수용자들을 강간치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731부대에서는 병사들의 군기를 확립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수용자 중에 가장 병약하거나 가장 저항이 심한 수용자를 실험재료로 사용하기 전에 육모방망이로 때려서 숨지게 하도록 강요했다. 이는 수용자를 인간으로 인식한 일본군 병사가 수용자를 탈출시켜 주는 것과 석방을 요구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다.
구성
이시이 부대, 즉 731부대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은 신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군(將軍) - 부대장인 이시이 시로 중장 이외에 총합 5명 이내만 존재한다.
고등관(高等官) - 좌관급 장교. 731부대에서 실험에 종사하는 기사(의사)의 경우는 소좌 내지는 중좌와 같은 대우로서 고등관으로 분류되었다.
판임관(判任官) - 위관급 장교. 실험 외적인 분야에서 책임자이거나 기사조수가 해당된다.
고원(雇員) - 부사관. 부사관 및 기타 잡다한 일의 작업반장으로서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용인(傭人) - 병사. 병사 및 가장 자질구레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수용소 간수는 거의 전부 용인이다.

Attached: 1513426803_4913f57b90215c3b01e35e91795bb1eb.jpg (431x602, 77K)

조선족 한마리 불타는거 보솤ㅋㅋㅋㅋㅋㅋㅋ

731부대는 6개의 부서로 나뉜다.

제1부: 여시니아증 감염, 콜레라, 장티푸스, 결핵에 대해 인간을 재료로 연구했다. 이를 위해 수용 시설 하나가 300 ~ 400명을 수용할 수 있게 건설되었다.
제2부: 생물학 무기를 연구했다. 특히 병균과 기생충을 퍼뜨리는 장치의 생산에 중점을 두었다.
제3부: 병균을 포함한 수류탄의 생산. 하얼빈 시에 위치해 있었다.
제4부: 기타
제5부: 요원 훈련
제6부 ~ 제8부: 시설, 의학, 행정 부서
상세한 편성은 오른쪽의 '보이기' 클릭
총무부
부관실
조사과
방첩반
번역반
인쇄반
사진반
병요지지반(兵要地誌班)
조사반
도서반
인사과
서무과
노무반
서무실
식당
주보(酒保)
학교
기획과
경리과
관리과
건설반
공무반
동력반
운전반
전화반
군수과
제1부(부장:菊池斉 / 세균 연구)
제1과(티푸스)
田部班(반장:田部井和 / 티푸스 연구)
제2과(콜레라)
湊班(班長:湊正男 / 콜레라 연구)
제3과(생리・마루타 관리)
吉田班(건강진단)
宮川班(엑스레이)
在田班(엑스레이)
栗秋班(약리)
草味班(반장:草味正夫 / 약리 연구)
石井班(포로 입출 관리)
蓬田班(포로 입출 관리)
志村班
특별반(특설 감옥)

Attached: 5f959227-b94f-4c0f-84be-d0aad88d41e3.jpg (1024x512, 43K)

관련인물
요코 가와시마 왓킨스 - 기요시 기와사마의 딸로 추정

희생자들
한국, 중국, 몽골, 러시아의 군인과 시민,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약 1만 명의 사람들이 생화학 병기의 실험 재료로서 살해되었다. 그 중에는 일부 흑인과 유럽인도 포함되었다. 731부대에서 개발된 생화학 무기로 인해 수십만 명의 중국인이 학살되었다.

한국인 희생자
2005년 8월 2일 하얼빈일보는 생체실험 대상자였던 1,463명의 명단을 발굴 공개했다.

지금까지 밝혀진 한국인 희생자는 6명으로 아래와 같다. 대부분 항일운동 또는 반파쇼 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인물로 파악되고 있다.

심득룡(沈得龍·1911년생·소련 공산당 첩보원·1943년 10월 1일 체포)
이청천(李淸泉·독립운동가·1944년 7월 체포)
이기수(李基洙·1913년생·함남 신흥군 동흥면·1941년 7월 20일 체포)
한성진(韓成鎭·1913년생·함북 경성·1943년 6월 25일 체포)
김성서(金聖瑞·함북 길주·1943년 7월 31일 체포)
고창률(高昌律·1899년생·소련 공산당 첩보원·강원도 회양군 난곡면·1941년 7월 25일 체포)
민간인
‘특별이송’은 만주 지방 일대에서 일본군 헌병대가 체포한 항일 독립운동가나 국민당 국군이나 공산군 포로, 외국의 첩보원 등을 대상으로 취조를 한 뒤 완강하게 버티는 인사들은 ‘개전의 정이 엿보이지 않는다’거나 ‘항일정신이 뼈에 사무치니 없애버리는 편이 낫겠다’는 이유로 생체실험 자료인 ‘마루타’(통나무라는 뜻의 일본어)로 지정해 재판도 없이 압송하는 것이다. ‘실험 재료’가 모자란 탓에 애꿎은 민간인이 헌병대에 의해 731부대로 특별이송된 경우도 있었다.
다음은 한국인을 ‘특별이송’한 자료중 일부다.

Attached: 148999_153492_279.jpg (800x392, 34K)

Fuck off hwagyo
GET OUT MY COUNTRY 화교벌레새끼야 내 나라 이미지 병신 만들지말고 느그 잘난 대만으로 돌아가라

...being korean must be suffering.

god bless the janny crusade. actually putting work on these menaces.

He is not Korean but Hwagyo(Taiwanese Korean)
they are mainly weeb and do that to ruin Korean image.

Thread has been captured by useless corean monkeys.

Attached: f.jpg (1280x720, 159K)

that nidanida sumida copy paste guy got removed lel

basea janny!

The janny saves the day